김병기 기자

영천성복성은 1592년4월 임진왜란으로 선조대왕은 의주로 피신을 떠나고 백성은 일제의 만행에 온갖 고초를 격고있던 차에 권웅수.정세아.정대임등 의병장들의 활약으로 육상전에서 첫승리를 거둔 전투다.

이 같은 국난을 극복하는 데는 의병이 큰 역할을 했음에 의론의 여지가 없다.

나라의 암흑기에 영천의 농민들이 일제의 만행에 항거하며 목숨을 걸고 총칼앞에 나섰던 것이다.

임란 최초 영천지역의 의병항쟁은 영천성 수복으로 적의 후방에서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과를 거둠으로 그 여세를 모아 전국에서 왜병을 후퇴케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4월23일 왜장 가등청정은 2만 군사를 이끌고 영천에 도착했다.

당시 영천 군수 김윤국은 겁을 먹고 달아났고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왜병들은 마을마다 불을 놓고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5월초 정세아(58) 정대임(40) 권응수(49)는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 복성을 꽤하게 된다.

진사 정세아는 영천 자양에서 제자들을 기르며 학문을 닦다가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휘하에는 900여명의 의병이 모여들어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정대임은 선비의 몸으로 대전 명산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동에서 그리고 당지산 전투에서 승리했다.

권응수는 선조 17년 별시무과에 합격한 무인으로 경상좌수사 박홍 휘하에 종사했으나 박 홍이 겁을 먹고 달아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신녕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토적 희손 등을 토벌, 한천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들 의병장들은 게릴라전의 양상으로 크고 작은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의병들의 사기가 왕성해지자 영천성 탈환계획을 세워 각 군·읍의 의병진에 원조를 요청했다.

7월24일 영천성 탈환직전 영천,신령,하양,경주,의흥,청송의 관군과 의병을 합해 4000여명이 모였고 경상좌도병사 박 진은 안강에서 화약류를 보냈다

이들 의병장등은 27일 영천성 탈환 전투에서 화공전으로 임난 최초의 육지전에 대승리를 이끌었다.

이어 영천성 탈환이후에도 영양, 경산, 대구, 의성, 경주, 울산등 가는 곳 마다 연승했다.

영천성 복성은 명량해전과 함께 임란 중 가장 통쾌한 승리였으며 이순신이 세운 전공과 동일한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을 당시 실록 기록과 류성룡, 이항복, 최 현 등의 평가였다

그렇지만 영천복성 당사자들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2015년 임진왜란사 연구 학술대회을 통해 전국의 학자들이 영천에 모여 영천성복성에대한 열띤토론이 벌어졌다.

한결같이 영천성복성은 임란 3대 대첩과 버금가는 승전이라고했으며, 순천향대학교 사회학과 이욱교수는 이번 발표를 계기로 많은연구와 사료 해석이 이루어져 영천성 복성과 영천지역 의병장들의 역할이 제대로 조명되고 교과서등에 반영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에 향토사 연구회등 영천지역 일부 인사들에 의해 영천성 복성을 문화행사로 승화시켜 호국의 성지로 가꿔가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영천성 복성 제조명에 앞장서야 할 시 당국은 영천성복성에대해 어떤 생각을 같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영천시도 하루빨리 영천성 복성의 중요성을 깨닦고 문화행사로 승화시켜 영천성 전투에서 성도 이름도 없이 전사한 분들의 위령탑이라도 건립하여 영천이 호국의 성지임을 제확인하는 계기로 영천성복성에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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