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여 년 전 우리나라 대가야 옛 도읍지
암각화-주산성-벽화고분-대가야궁성지 등

(고령=신해관 기자) 고령군은 경상북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산 높고 물 맑은’ 살기 좋은 고장으로,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 우리나라 고대사의 한 축을 이루었던 대가야의 옛 도읍지였다. 

고령지역에는 장기리암각화를 비롯해 주산성, 고아동벽화고분, 대가야궁성지 등 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어, 유적·유물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야외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구)양전동 암각화

■ 암각화의 고장, 고령

암각화, 즉 바위그림은 말 그대로 바위나 암벽에 사실적인 그림이나 도형을 그리거나 새겨놓은 유적을 말한다. 특히 암각화는 시기적으로 구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혹은 초기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사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생활상 등을 표현해 놓은 것으로, 문헌자료가 전하지 않는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암각화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71년에 장기리암각화(舊양전동암각화)와 울산의 반구대암각화가 처음 학계에 보고되면서부터였다. 특히, 우리나라 암각화의 80∼90%는 장기리암각화에서 보이는 ‘신면형’ 그림이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신면형 암각화를 흔히 ‘장기리식 암각화’로 부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장기리암각화는 우리나라 암각화 연구의 효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령지역에서는 장기리암각화, 안화리암각화, 지산동30호분 개석암각화, 봉평리암각화 등 4개소에서 암각화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이는 단일 지자체 중에서는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또, 바위그림 뿐만 아니라 바위에 구멍을 새겨 놓은 바위구멍 유적도 매우 많은데, 윷판모양을 그려놓은 윷판형 바위구멍, 구멍 사이를 홈으로 연결해 놓은 별자리형 바위구멍 등도 많은 수가 확인되고 있다. 

그림의 내용도 장기리암각화에서처럼 동심원과 신면형을 비롯해, 성기모양을 강조한 인물상, 석검과 청동투겁창, 윷판형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런 점에서 고령지역을 소위 ‘암각화의 고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고령 향교

■ 고령향교에서 고령의 역사를 보다. 

대가야읍 연조리의 주산(主山 혹은 耳山)의 지맥이 뻗어 나와 만든 구릉 위에는 고령 유학 교육의 산실인 고령향교가 자리 잡고 있다. 주산에서 흘러내린 내룡(來龍)은 지기가 뭉쳐지는 혈장(血場)까지 몇 차례 굽이치면서 향교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대가천 너머 위치한 망산(望山)은 고령향교의 안산이면서 곧 조산이 된다. 이처럼 고령향교는 대가야읍에서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길지에 입지하고 있다. 

고령향교가 건립되어 있는 곳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다. 대가야시대에는 나라의 중심인 궁성과 왕실 건물들이 건립되어 있었다.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왕궁은 폐허가 되었다. 대신 신라에서는 대가야의 궁성이 있던 곳에 절을 건립하여 망국의 한을 안고 살아가던 고령사람들의 민심을 달래려고 하였다. 그 절이 바로 물산사였는데, 고려시대까지 고령의 중심사찰이었다. 그 후 조선시대가 되어 숭유억불정책이 시행되면서, 물산사는 점차 쇠퇴해져 갔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그 곳에 고령향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곳이 ‘임나대가야국성지’ 비석을 세웠다. 독립이 된 후 그 자리에 ‘대가야국성지비’가 건립되었다. 이처럼 고령향교는 대가야시대 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령지역의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한 몸에 품고 있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 

 

주산성

■ 대가야 궁성 방어의 최후의 보루 ‘주산성’

주산성은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주산主山에 위치하고 있다. 주산은 해발 310m 내외의 나지막대가야 산으로 남북의 두 봉우리가 사람의 귀 모양을 하고 있어 이산(耳山)이라고 불렸다. 『삼국사기』에는 ‘이산성(耳山城)’에 대한 기록이 2곳에서 보인다. 주산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 중턱에 쌓은 석축(石築)산성이다. 성의 길이는 내성이 710m, 외성은 1,420m이며, 총면적은 104,500㎡ 정도이다. 성 안에는 치(雉), 건물지, 연못 등과 장대지와 배수구 등이 확인되었다. 주산성은 대가야의 왕궁을 방어하기 위한 배후성으로, 유사시 피난 항전하기 위한 대가야 산성 방어체계상의 주성(主城)이었다. 대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당할 때에도 주산성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고령 주산성은 지난 2010∼2년까지 발굴조사하였다. 산 경사면을 활용해 바깥쪽만 쌓아올린 외면쌓기 방식의 석축성으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간단하게 다듬어서 사용하였다. 성벽은 지산동고분군의 무덤을 쌓은 방식과 같이 바깥쪽은 평평한 면을 수평으로 맞추고, 틈을 메우기 위해 작은 쐐기돌을 많이 사용하였다. 성벽 바깥 하단에는 성벽 기초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비스듬하게 보강석을 쌓고, 흙으로 단단하게 다져 놓았다. 성벽의 윗부분에는 배수로가 설치되었고, 아래에는 물받이 시설을 설치하여 성벽의 손상을 막았다. 주산성의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지역 석축산성 부재론’에 종지부를 찍고, 대가야의 국력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고분군

■ 고령의 대표적인 고분군인 지산동 고분군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는 주산 위에는 대가야시대의 산성인 주산성이 있다. 그 산성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위에는 대가야가 성장하기 시작한 400년경부터 멸망한 562년 사이에 만들어진 대가야 왕들의 무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대가야의 화려했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지산동고분군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 왕릉인 지산동44호와 45호분을 비롯하여, 그 주변에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크고 작은 700여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대가야의 독특한 토기와 철기, 말갖춤을 비롯하여 왕이 쓰던 금동관과 금귀걸이 등 화려한 장신구가 출토되어 대가야 최대의 중심고분군임을 알 수 있다. 지산동고분군을 통해 대가야가 삼국에 버금가는 고대국가로 성장 발전했으며, 우리 고대사를 ‘4국시대’로 파악하려는 인식이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특히, ‘지산동고분군’은 무덤의 숫자와 규모, 출토유물의 우수성에서 가야지역을 대표하는 고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인정받아 2013년 12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최근, 고령군에서 전문학술기관에 의뢰하여 정밀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놀랍게도 육안으로 확인되는 봉토를 가진 고분이 대략 700여기로 조사되었다. 이 숫자는 단일 고분군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봉분 숫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 육안 상 확인되지 않는 작은 돌덧널무덤(석곽)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예를 들어 왕릉전시관이 건립된 부지의 경우 봉분이 없는 작은 무덤이 200여기 이상 조사되었다. 따라서 지산동고분군에는 700여기의 봉토분과 봉분이 없는 작은 무덤을 모두 합하면 2만여기 이상이 될 것이라고 추정된다. 

지산동고분군은 대체로 대가야시대에 조성된 고분으로, 대가야의 왕과 왕족, 귀족들의 무덤으로 생각된다. 고분의 규모는 지름 40m 이상이 1기, 30~40m 사이가 5기, 20~30m 이상이 13기, 10~20m 사이가 대략 100여기 정도이다. 이 중 고분의 규모가 큰 고분은 왕과 왕족일 것이고, 그 미만은 상·하급의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 지산동고분군은 대체로 400년경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대가야가 멸망하는 562년까지 축조된 것이다. 즉 대략 160여년간 700여에 달하는 고분이 조성된 것이니, 1년에 4.4기 이상의 고분이 만들어진 셈이다. 대가야의 최고 지배층들이 자신들의 무덤인 지산동고분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가야의 무덤은 주로 뒤에는 산성이 있고 앞에는 마을과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와 산줄기에 위치한다. 특히, 왕릉급의 무덤은 한가운데 왕이 묻히는 큰 돌방을 하나 만들고, 그 주위에 껴묻거리를 넣는 돌방 한두 개와 여러 개의 순장자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돌방은 길이에 비해 폭이 아주 좁은 긴 네모꼴인데, 깬 돌을 차곡차곡 쌓아 벽을 만들고 그 위에는 큰 뚜껑돌을 여러 장 이어 덮었다. 무덤 둘레에는 둥글게 돌을 돌리고 그 안에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다져 가며 봉분을 높게 쌓았다. 

700여개가 넘는 지산리고분군의 대가야 무덤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60여년간 지속적으로 만들어 졌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대체로 아래쪽에 있는 무덤들이 먼저 만들어졌고 차츰 능선의 높은 쪽으로 올라가면서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왕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더 높은 곳에 더 큰 무덤을 만들려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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