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權力)이 아닌 권한(權限)을 국민(國民)들로 명심

김광수 기자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사자성어를 떠올리고 싶다. 

파사현정(破邪顯正)는 ‘사악하고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지난해 우리나라 정국은 국정농단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이전 정부를 촛불 시민의 힘으로 주저앉히고, 새 정부 출범 뒤 적폐청산에 나선 현실에 의미를 부여한 크나큰 한해였다. 자칫 바람앞에 촛불이 될수있었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해 자발적인 촛불민심이 하나하나가 모여 거대한 촛불혁명을 이루었다.

지난 과거 1960년 4·19혁명은 그해 2월 28일 대구의 8개 고등학교 학생의 연합시위에서 출발하여 전국적으로 고등학생의 시위운동으로 확산되어 4월 18일부터 대학생이 참가한 학생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학생운동으로 보면 일제강점기 이래 중등학생 중심의 학생운동이 비로소 대학생 중심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러한 학생운동이 4월 19일부터 일반 시민이 참가한 시민혁명운동으로 발전하여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곧 통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4·19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 하면서 평가를 절하하는 경우가 있다. 언제 어디에 일회성 혁명이 있었던가. 

프랑스혁명도 1789년부터 1848년까지 59년이 걸렸다. 중국의 신해혁명은 1911년부터 북벌을 완성한 1928년까지 본다고 해도 17년이 걸렸다. 

4·19혁명은 1960년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 27년, 1993년까지라면 33년이 소요되었다. 그 동안에 1960년대에 6·3항쟁과 3선개헌반대투쟁, 1970년대에 유신반대투쟁과 부마민중항쟁, 1980년대에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이 있었다. 

거기에는 4·19혁명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이 면면이 흘러 그것이 한국현대사의 양대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후 5.18 민주화운동, 또는 광주민주화운동은 크게는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 좁게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대한민국의 독재 군부가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로 죽인 학살 범죄가 일어나기도 했던,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이기도 하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였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킨다.

12.12 군사반란이 만든 계엄령과 대학교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으며,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사건 당시 군부의 통제로 인해 언론매체는 ‘광주 사태’로 일컬었다. 하지만 군부 정권이 끝난 이후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 ‘광주 사태’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일부 민간인들을 중심으로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가 군부에게 유린당했다는 것에서 따와 ‘광주 사태’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미디어에 따라 광주민중항쟁, 광주 학살, 광주 사태 등으로 부르며, 보통 일어난 날짜를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신군부의 군사독재에 맞서 일어난 시위가 진압군과 격한 대립을 벌인 끝에 광주에 진입하려는 진압군과 광주시민들의 총격전으로 발전, 결국 진압되지만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군사정권에 의한 인권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진다.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과 이후 여파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희생으로 의의가 남다르다.

신정부는 이전정부의 교훈을 삼아 “민심은 천심”이란 뜻을 받들어 “국민을 위한 국민을 위한 정치와 정책”을 잘 풀어나아 가기를 바랄뿐이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전국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