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준 영남취재본부 국장·청문관

우리나라 만큼 정당의 이합집산이나 정치인의 당적 이동이 잦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이 비(非) 서구국가들 가운데 민주화가 비교적 진전됐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기이한 현상이다. 

도대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 정치인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내적 문제와 정치인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 문제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내적 문제가 정치인 자신의 신조 및 자질과 관계된 것이라면, 외적 문제란 정치생명의 유지를 위해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따라야 하는 구조적 문제, 그리고 제도적 차원에서 이미 틀지워져 있는 조건 등을 가리킨다. 구조적 문제는 우리네 정당이 시민사회의 조직화된 이익과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정당이 정상적으로 발전하려면 시민사회의 동원화를 거쳐 스스로의 가치와 이익체계를 정립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정반대로 지역적 연고에만 뿌리를 둔 채 지역대표자를 중심으로 전개돼 왔다. 이는 우리 정당체제가 상향식·수요자 중심이 아니라 하향식·공급자 중심으로 발전해 온 원인이기도 하다.

영국의 원스턴 처질은 보수당 당적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4년만에 자유당으로 옮긴다. 그는 18년간 자유당의원으로 내무장관까지 지낸 뒤 다시 보수당으로 복귀, 총리를 두 번이나 역임하며 2차세계대전을 치른다. 영국에서는 정당을 옮기는 것이 정치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대정치인으로서의 족적을 남겼다. 지금도 그를 ‘철새 정치인’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다. 

미국에서도 당적을 옮기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다. 그러나 이를 극복한 의원들도 가끔 있다. 80년대 초 텍사스출신 민주당 하원의원 필 그램은 느닷없이 의원직을 내놓았다. 민주당은 뜻이 맞지않아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기겠다는 것이 그의 사퇴이유였다. 그는 사퇴후 다시 공화당 후보로 보궐선거에 참여해 당당히 당선됐다. 그후 상원의원으로서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까지 떠올랐던 그를 두고 ‘철새 정치인’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다.

정치인이 소속 정당의 정책이나 이념에 거부감을 느낄 때 그 당을 떠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처칠이나 그램을 ‘철새 정치인’ 으로 부르지 않는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정당은 옮겼지만 다시 유권자의 심판을 받아 온다면 누가 그를 탓하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철새 정치인’들은 다르다. 현재의 보직을 내 놓기는 커녕 오히려 보신(保身)만을 위해 항상 권력의 보호를 받는 ‘안온(安穩)한 서식지’만 찾아 다닌다. 

합당이나 분당 등 정치권의 지각변동으로 당적이 바뀌는 경우는 그래도 봐줄 수 있다. 그러나 여당 또는 야당으로 ‘양지’를 찾아간 ‘철새 정치인’들, 이들은 지역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변신’을 설명하고 있을까. 

겉으로는 기자회견까지 열고 지역갈등 타파니, 새 정치 구현 운운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은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유권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피해야할 후보자에 대한 원칙에 해당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본인 스스로가 먼저 선거에 나오지 않는게 그나마 국민에 대한 도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본인 스스로에 의해 걸러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소속정당이나 선관위에서 솎아내주는 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솎아지지 않았다면 우리 유권자들의 손으로 직접 도려내는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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