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영 大記者

파스칼은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설파했다. 

흔들리는 갈대처럼 인간의 유연성 있는 사고력을 강조한 것이다. 사고력은 만물 중에 인간만이 소유한 두드러진 특성이다. 만약 생각하는 기능이 사람에게 없다면 답답한 동물 세계에 보다 가깝다고 봐야 한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두드러진 특성은 역시 생각하는 기능에 있을 것이다. 동물들에게도 극히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사고력이라기보다는 본능이다. 인간 세계에도 출신, 문화의 차, 교육 정도에 따라 그 차이는 두드러진다.

자고로 생각하는 힘은 인류역사와 문명을 이끌어 온 위대한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이 만큼의 문화의 혜택을 향유하는 것도 모두 이 사고력의 덕분이다. 원숭이는 몇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생활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 동물세계에서 교육 수단으로 전화 비슷한 것을 사용하고 쾌속한 왕래를 위해 자동차나 비행기를 고안해서 타고 다녔다는 사례를 본적이 없다. 그런데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인간에게만 주어진 이 사고력에는 부정적 측면은 도사리고 있다. 사고력을 악용하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정치하는 사람들, 인간관계에 걸친 사회 제반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무참하게 괴롭히고 고문하고 탄압하고 무시하고 물어뜯는 이 처참한 현실을 보면서 이것 역시 사람만이 소유한 특권인가하고 생각이 들어서 조소를 금할 수 없다. 물론 짐승들도 물어뜯고 살육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이것은 동물세계의 단순한 생존원리이다. 그러나 인간 세계 속은 옹졸하고 추잡하고 난폭하기 그지없다. 가공할 테러와 살인이 정말 의식(衣食)에 핍절한 극한 상황에서 저지르는 짓거리인가. 유사이래. 감행된 숱한 고문과 학살과 전쟁은 모두 피치 못할 막다른 골목에서 자행된 필면인가?

사자와 맹수들은 배가 부르면 그늘에서 누워 휴식을 즐긴다.

결코 먹이를 제걸스레 끌어 모아 쌓아두는 일이 없다. 배가 출출해 지고 새끼들에게 먹이를 공급해야할 필면에 의해서만 뛰쳐나가 물어뜯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살육과 전쟁은 그 중 몇이나 금수의 사냥 동기나 명분에라도 버금가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인간의 욕망이란 때로는 금수의 그것보다 훨씬 비굴하고도 추악한 것이다.

끝 간 데 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게걸스레 부익부(富益富)를 구가하는 밉살스러운 현상은 오직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만이 소유한 악습이다. 삐뚤어진 사고력의 부산물인 것이다.

인간이 여타 동물에 비해 우월한 점은 이 사고력과 사고력의 바른 활용에 있지만 인간이 동물만도 못해지는 것도 이 사고력의 악용에 기인한다.

역시 욕심이 끝 간데를 알 수 없고 사람이 욕심이 문제이다. 굴레 벗은 욕망이 치닫는 종착역은 실제로 가보지 않아도 뻔하다. 끝까지 그냥 질주만 할 것인가 아니면 잠깐 삶의 발걸음을 멈추고 심호흡도하며 생각을 통해 삶의 매듭을 잡을 것인가 인생의 경기장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선수이자 감독이다.

자신 외에는 휘슬을 불어 줄 사람이 없다. 굶주린 한때의 야수들 앞에 한 덩이 고기를 던질 때 그들은 당장 달려들어 물어뜯고 서로 독차지하려고 혈투를 벌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나무랄 데 없는 본능이다. 그들은 그 이상 배운 바도 아는 바도 없다. 그들에게는 그 이상을 깨달을 사고력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과는 달라야 한다. 본능을 초월하는 사고력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능을 억제하고 초월하는 것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말하기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평소부터 생각하기를 길들이고 본능에 재갈 물리기를 배운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자신을 앞세우거나 목전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비열한 생각의 습성을 버리고 한심하고 더러운 자신을 잊어버리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삶이 익숙해 질 때 행복의 파랑새는 나를 위해 행복과 만족과 보람의 노래를 불러 주리라.

필자는 두전직 대통령 구속에 이어 최근 정치권의 행태를 보느라면 서글픈 생각만이 뇌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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