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방보훈청 보훈과 오제호

자신의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는 살신성인(殺身成仁), 목숨을 버리고 옮음을 추구한다는 사생취의(捨生取義)는 모두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옳은 도리를 행함을 가리킨다. 이러한 말들의 뜻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그 실천자들은 의인(義人)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의인에는 여러 가지 사례가 있을 수 있지만 아래에서 소개할 허봉익 육군 대위가 가장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1923년 1월 3일 대구에서 태어난 허봉익 육군 대위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인 1948년 12월 21일 육군사관학교를 7기로 졸업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정부수립 1년 10개월 만에 발발한 6·25전쟁이 대한민국에 거대한 위기로 다가왔듯이 임관 1년 7개월을 막 넘긴 청년장교에게 전쟁은 가혹한 시련이었다. 악화일로를 걷는 전황에 따라 허 대위도 남쪽으로 퇴각하던 중 본래 소속부대였던 2사단이 와해되어 8사단으로 배속을 옮기게 됨에 따라 16연대 3대대 3중대장으로서 안동지구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안동지구전투는 국군과 UN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기 직전, 북한군의 남하를 안동지역에서 7월 30일부터 4일간 저지한 지연작전이었다. 북한군의 공세로 안동 오산동 일대의 최후 방어선이 무너질 즈음, 아군은 육군본부의 낙동강방어선 형성계획에 따라 안동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가장 후위에서 철수를 명령 받은 8사단 16연대는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각개철수를 전개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16연대는 835명의 장병이 전사 혹은 실종되는 큰 손실을 입었다.

누군가는 철수 대신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야 아군의 희생이 최소화되는 상황에서, 8사단 16연대 3대대 3중대장 허봉익 대위는 살신성인 정신을 발휘했다. 약 2개 소대 병력을 인솔한 허 대위는 안동 점령을 기도하는 북한군 2개 대대 병력과 백병전을 전개했다. 놀라운 결사항전으로 북한군 1개 중대를 격멸하고, 촘촘한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애당초 생존의 가능성이 희박한 결정이었기에, 북한군의 포격 속에서 중과부적으로 현장에서 전사했다. 

결사대로 나서 철수 대신 적진 한가운데로 진격한 허봉익 대위와 2개 소대원들은 살아 돌아올 수 없었지만, 이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허 대위와 소대원들이 죽음과 맞바꿔 얻어낸 짧은 시간이, 아군에게는 북한군의 추격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후퇴하여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할 소중한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허 대위는 1954년 태극무공훈장에 추서되었고, 1956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 장교묘역(15-5-114)에 안장되었다. 그렇게 조국의 품에 영면한지 68년 만에 허 대위는 ‘8월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우리들 곁에 다시 돌아왔다. 68년 전 뜨거웠던 여름 그가 목숨바쳐[殺身] 이룩하려던[成] 인(仁)이란 다름 아닌 ‘호국(護國)’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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