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북부보훈지청 복지과 김정애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그 유래를 찾아 볼수 없을 정도로 격렬했다. 이는 우리 민족적 기질과 더불어 일본의 식민통치의 구조적 성격 때문이다. 식민통치의 방법으로 두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기존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국가로 만드는 '합병', 기존 체제를 인정하고 자치를 인정하는 '지배'가 그것이다. 일본은 '합병'의 형식으로 우리나라를, 영국은 지배의 형식으로 인도를 식민통치 하였다. 합병은 피지배 민족을 말살시키기때문에, 필연적으로 큰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실제로 일본은 '내선일체'를 내세워, 민족말살 정책을 시행했다. '일선동조론'을 근거로 황국신민 아래 조선인을 편입시켰다. 일본인은 일등신민이 되었고, 조선인은 이등신민이 되었다. 이어 창씨개명, 국어사용 금지 등이 시행되었다. 교육, 문화, 정치, 경제, 종교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합병을 위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독립운동도 실력양성운동과 무장투쟁로 나뉘어 같이 전개되었다. 국내 탄압이 심해지면, 해외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치열한 독립운동사에, 목숨을 바쳤던 순국선열들이 있었다.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 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을 위해 항거하다가 순국한 인물들을 말한다. '순국선열의 날'을 지정하여 기념한 유래는 임시 

정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9년 임시정부는 을사늑약(1905년 11월 17일)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날로 '순국선열의 날'을 정했다. 임시정부가 순국선열의 날을 지정하여 추모한 것은 당시 위태로운 독립운동의 명백을 이어가기 위함이였을 것이다. 대표적인 순국열사로는 이준 열사, 윤봉길 의사, 이강년 의병장, 만해 한용운등이 있다 

민족적 기질은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 스스로가 일어나 조직해왔던 '의병'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순국선열 모두가 의병은 아니였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병 정신"은 모두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병 정신을 물려받은 순국선열들에게는'싸우면 되찾을 수 있는지'보다 '싸운다는 것'이 중요했다 

의병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가지만, 고려시대때 몽골에 맞선 '항몽'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가장 활발하게 의병활동이 있었으며, 미약했지만 양자호란때도 의병이 일어났다. 

이는 조선말기 동학농민운동, 을사의병, 정미의병까지 이어졌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어, 독립군운동, 광복군운동으로 이어졌다. 

심우장으로 향하던 길, 대표적인 저항시로 손꼽히는 [님의 침묵]을 펼쳐보았다. 빼앗긴 나라를 그대로 지켜볼 수 없었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순국선열들의 심정이느껴졌다. 

"님은 갔지마는 / 나는 님을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숱한 독립운동에도 조국의 광복은 오래 침묵하였지만, 그 긴 침묵에서도 차마 조국을 보내지 못해 목숨을 내던진 순국선열들. 세계 2차대전에서 일본이 항복을 하면서 물리적으로 독립했다면, 순국선열들의 희생으로 정신적으로도 독립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했기에 민족의 자주성을 잊지 않았음을 감사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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