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영 大記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은 어느덧 이 세상 아빠들을 두 분류로 나누어 버렸다. 한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의 41.7%가 10억에서 50억 원은 갖고 있어야 부자라고 할 수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재산이 10억이 안 되는 이 나라 대다수의 아빠는 모두 가난한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부자 아빠가 되어 자녀들에게 떳떳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돈을 벌려고 나서거나 가난한 아빠라는 슬픈 이름표를 달고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느 가정에 6살 딸아이가 “아빠 나는 커서 돈 많이 벌 거야”라고 말했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에게 돈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는 현실이 무척 가슴이 아팠다. 요즘 아이들은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으면 “부자가 되고 싶다”라고 얘기한다. 부자는 직업이 아닌데도 어린 아이들이 부자가 되고 싶은 소망을 이야기하고, 부자 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던 아빠조차 그런 아이들의 가치관에 혼란을 느낀다. 우리는 왜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가?

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부자가 주는 여유, 인정받음, 미래에 대한 안정감이 그 대답이 될까> 요즘 “부자 되세요”라는 CF모델의 음성을 들으며 몇 명이나 부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인생역전을 이루어 준다는 로또 복권이 몇 명의 부자를 이 나라에 만들어 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가난한 아빠라는 타이틀을 그리 슬퍼하지 않는다.

“예야. 아빠가 가난하니 부자니?” “가난해요”

“그래도 아빠가 다른 사람들을 잘 도와주니 그렇지 않아”

다행히도 내 딸은 내가 남을 잘 도와준다고 대답했다.

그런 덕분에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었고 아직 가난하지만 지금은 자녀들 앞에 당당하게 살고 있다.

나는 가난한 아빠라는 슬픔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 왔지만, 자녀들에게 당당한 아빠로 살아 왔다.  

가진 것 별로 없지만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에게 돈도 마음도 시간도 건강도 나누어 주면서 살지만 솔직히 내 심정은 어느 큰 부자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다. 오히려 옹졸하게 인색하게 살아가는 그분들이 한없이 불쌍하게만 여겨진다.

세계은행은 매년800만명이 가난으로 죽어가고11억 명이 절대빈곤을 겪고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런 절대빈곤의 숫자는 매년 줄고 있다.

옛날에는 부국과 빈국의 구별이 없었다고 생각이 된다. 그저 각국의 극소수가 부를 거머쥐었고 나머지 대다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산업 혁명 이후 빈부의 차이가 개인이나 국가 간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근래에 와서는 극빈자의 수가 15억 명이나 되었다. 산업 혁명이 전 세계에 퍼져 나간다면 극빈자가 사라지고 가난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없어질까?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의 보릿고개가 사라지고 아직 미흡하지만 여러 복지 정책이 실행됨으로 극빈자에게 살길을 열어 주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조그만 도움이 있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빈곤으로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부와 빈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물질을 중요시하고 서로를 질시한다.

빈자가 줄어들고 그 빈자도 이전보다 부유해졌지만 사람들은 무정해지고 돈을 더욱 사랑하므로 더 귀중하고 좋은 것들과 행복을 잃어버리고 있는 모습이 참담하다.

이전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인생의 중요한 이슈였지만 이제는 남보다 더 좋은 차를 가져야 하고 더 좋은 주택,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명예를 가지고 살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되고 있다. 절대적 빈곤은 줄어들고 있지만 상대적 빈곤감은 더욱 커져 가고 있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의 모습은 더욱 험악해 지고 있다.

부한 자들은 더욱 욕심을 내고 가난한 자는 부유한 자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질시한다. 빈부의 이분법이 세상을 어둡게 한다.  

“세상 마지막 때에는 만물이 고통 하는 일이 온다.” 

사람들은 만 가지 악의 뿌리가 되는 돈을 사랑하고 무정하며 사나우며 원통함을 풀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노숙자 100명 가운데 20명은 알코올 중독자들이다.

10명은 심하게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며 4명은 결핵환자이다. 

대부분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사정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은 무섭기까지 한 불평등을 백일하에 노출 시켰다. 가난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대체로 좀 더 풍요로운 사람들은 그다지 많은 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거대 부호들은 전혀 일하지 않는다. 물론 부자 나라라도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저임금에 커피와 바나나농장, 옷과 운동화 만드는 열악한 노동조건의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비교할 때 가혹한 노동을 하고 있는 것 절대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부유하고 가난한가? 우리는 정말 부유하기도 하고 정말 가난하기도 한다. 그 동시대성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조금은 더 부유한 우리가 가난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망설임과 주저함이 가슴에 서며 있다.

무언가를 해 주어도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현실이 더욱 마음을 저리게 한다.  이런 모습이 가난해 보이고 그건 우리로 인해 아프다. 우리의 부유함과 가난함을 우리와 세상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왜 우리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망설이고 주저하며 더 나아가서는 시선을 거기에서 외면하는가? 가까운 우리 주변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이 홀로 흐느껴 울부짖는 울음소리에 귀 기울여 주기를 간절히 호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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