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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의사의 숨결을 따라서
도민일보 | 승인 2019.01.28 17:06
서울남부보훈지청 보훈과 정진호

서울시 서초구 양재시민의 숲에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다. 서울에 오랜 기간 동안 살았지만 이곳을 와 본건 처음이다. 올해 8월에 오래된 시설을 리모델링하여 재개관을 하여 기념관 시설은 무척 쾌적했고 전시실 및 VR체험관 등의 시설을 구비하여 관람객들로 하여금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전시실을 돌아보며 윤의사의 행적을 쫓아가 보았다. 윤의사는 충남 예산에서 출생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를 하여 서당인오치서숙(烏致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초기에 윤의사는 부흥야학원 및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민계몽운동과 농촌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농민독본>이라는 책을 편찬하여 농촌 청년들의 단결과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윤의사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당시 만주군벌의 실질적 배후였던 일본은 직접 전면으로 나서서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화 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을 맞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을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거행하자 윤의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장군 2명을 죽이고 고위관료 5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사건은 중국과 세계에 일본의 불법적인 조선 침략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더 나아가 중국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여 대한광복군과 함께 연합전선을 펼쳐 일본에 항거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약관 25세에 불과했던 윤의사의 상해의거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당시 중국의 장제츠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 내었다니 대단하다!”라고 윤의사를 극찬하였다.  

안타깝게 윤의사는 의거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헌병대에게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고 같은 해 5월에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이후 오사카에 있는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9일 가나자와 미고우시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총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윤의사의 유해는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되어 1946년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기념관을 나서며 다시 한 번 그날의 애통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거리를 거닐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윤의사와 같은 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평화로운 시대 일수록 항상 만일에 대비하고 다시는 우리의 주권을 뺏기지 않도록 국력을 더욱 굳건히 키워나가는데 정부와 국민이 맡은 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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