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방보훈청 홍보 담당 오제호

대일항쟁기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자, 1차 세계대전 전승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독립운동인 3·1운동은 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쾌거이다.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15,180명 중 약 33.4%에 해당하는 5,070명이 3·1운동으로 포상되었다는 사실은 3·1운동이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이 5,070명 중에는 민족대표 33인, 유관순 열사와 같이 익히 알려진 분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적지 않다. 물론 방대한 3·1운동사 전부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보다는 더 재조명되었으면 하는 분들 혹은 그러한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3·1운동의 배경에는 주로 거론되는 일제의 무단통치, 민족자결주의 제창, 고종의 독살 의혹 외에도, 국제질서를 활용하여 조국독립을 도모했던 신한청년당의 활동도 있다. 비록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의 활동은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놀라운 나비효과를 발생시켰다. 외교활동을 위해 세계각지에 구축한 신한청년당의 네트워크는 독립의 열망을 국내외에 전달해,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물론 3·1운동을 이끌어낸 숨은 도화선이 되었다.   

철저한 준비 끝에 다가온 1919년 3월 1일, 하지만 만세운동을 이끌어야 할 민족대표 33인은 약속장소인 탑골공원 대신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낭독했다. 이에 민족대표 33인을 대신하여 탑골공원의 만세운동을 이끈 주역은 당시 학생이던 강기덕, 김원벽, 정재용 선생 등이었다. 만세시위에 참여할 학생들을 규합하고,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며, 독립선언을 낭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3월 1일 현장에서의 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했다. 3월 5일에는 남대문역(현 서울역) 만세운동을 다시 주도함으로써, 체포된 민족대표의 공백을 메우고 1회성 사건으로 가라앉는 듯 했던 3·1운동을 거족적 항일투쟁으로 확산시키는 데 지대하게 공헌하였다. 

이렇듯 학생들이 주도한 2차 만세운동에서는 여학생들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김마리아 선생은 동경 2·8독립선언 소식을 국내 여학생들에게 전파하여, 이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주도했다. 비록 김마리아 선생은 3월 6일 여학생 독립운동 조직 결성을 기도하다가 체포되었지만, 선생의 장한 뜻은 다른 여학생들에게 계승되어 3·1운동을 꽃피웠다. 함북 명천 화대장터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16세의 동풍신 여사, 경성여자보통학교 재학 중 귀향하여 배천(황해도 연백 지역의 옛 지명)의 만세운동을 이끈 최은희 여사 또한 3·1운동을 이끈 숨은 주역이다. 

한편으로는 3·1운동을 위해 일가가 투신한 사례도 있다. 앞서 언급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을 마련한 분은 우사 김규식 선생이다. 선생의 아내였던 김순애 여사는 남편의 파리행 이후 형부 서병호와 함께 입국하여 3·1운동의 확산에 공헌했다. 위에서 언급된 김마리아 선생은 여사의 조카였다. 이 외에도 김순애 여사의 오빠인 김필순 선생, 동생인 김필례 선생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총 여섯 분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김규식 선생의 가문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상이자 3·1운동 명문가로 기억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앞에서 언급된 내용 외에도, 3·1운동의 발단부터 시작과 확산의 전 과정에는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할 숭고한 역사는 더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더 찾아내 알리는 일은 비단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공헌에 보답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는 역사를 바로잡고,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애국정신을 계승하여 붕정만리와도 같은 대한민국의 미래 청사진을 기약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벌써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주년을 맞이한 사실 자체는 기쁘지만, 부단히 흘러가는 시간은 3·1운동의 기억도 함께 망각시킨다는 점에서 결코 우리의 편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3·1운동 선양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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