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성공 위한 10대 학도병 참전 139명 전사
산화장사해변 기념공원 조성, 문산호 복원 등 재조명

2019년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식

(영덕=임상휘, 이용준 기자) 경북 영덕군(군수 이희진)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개시된 장사상륙작전의 전승을 기념하고,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업적과 굳건한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받고자 6일 장사해수욕장 내 전승기념탑에서 ‘2019년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식’을 개최했다.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와 영덕군이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참전영웅으로 생존해 계신 장사상륙작전유격동지회 회원 20명과 유가족, 이희진 영덕군수, 김재광 경상북도 복지건강국장, 장경식 경상북도의회 의장, 엄용진 제50보병사단장, 김은희 영덕군의회 의장, 김유문 경북남부보훈지청장 등 주요인사와 영덕군 보훈단체회원, 주민ㆍ군장병 등 500여 명이 참석, 영화 ‘장사리:잊혀진 영웅들’ 의 김태원 태원엔터테인먼트 대표와 김명민, 김성철, 김인권 배우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특히 제50사단에서 서바이벌 체험, 군사장비 전시 등을 풍성하게 준비했고 임시로 문산호를 개방해 관람하는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동시에 진행됐다.

이번행사는 생존영웅들인 장사상륙작전유격동지회 회원들의 인터뷰 영상과 죠이풀합창단의 꽃전달, 남정초등학교 학생의 감사편지 낭독 등의 이벤트로 감동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앞서 전날인 5일 저녁에는 영덕불교사암연합회(회장 현담 스님)에서 주관하고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위령제가 진행됐다.

한편, 장사상륙참전유격동지회 류병추 회장은 “참전용사들의 극진한 예우에 감동했으며, 매년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식을 개최해 주신데 대해 이희진 영덕군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희진 영덕군수는 “장사상륙작전유격동지회 영웅들의 뜨거운 애국혼은 우리의 자랑이며, 후세에 깊이 계승되어야 할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다”라고 강조했다.

■ 영덕 장사상륙작전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쟁이 발발한지 4일 지난 뒤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조선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미국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구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 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했다. 

해군의 일부 인사들이 작전 성공률이 5000대 1이라고 주장하며 격심하게 반대했으나, 맥아더는 오히려 이런 난점이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인천 상륙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8월 28일 미국 합동 참모 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었다. 사실 인천 상륙 작전은 정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일단 조수간만의 차가 엄청나고, 또한 인천항을 지배하는 감제 고지인 월미도를 사전에 점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에서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해 태평양에서 '섬 건너뛰기 전술'로 큰 효과를 보았던 맥아더는 이번 상륙작전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이어 세계 전사에 남을 만한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우리나라는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두 달도 안 된 8월 초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하던 끝에 유엔군 참전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중순에야 전세를 역전했다.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결정적 계기를 만든 인천상륙작전 성공에는 꽃다운 학도병들이 목숨을 던진 장사상륙작전이 있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하루 전인 9월 14일. 경북 영덕군 장사리 해변에서 북한군 이목을 인천에서 돌리고 북한군 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상륙작전(작전명 174)이 시작됐다. 

이를 위해 10대 학도의용군 772명을 비롯한 유격대원 841명이 13일 부산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출정식을 한 뒤 부산항 제4부두에서 LST(상륙함) 문산호를 타고 14일 오전 2시 30분께 장사리에 도착했다. 

불과 20여일간 훈련받은 학도병에게 군에서 지급한 것은 소련제 장총, 북한군 군복, 탄약, 식량인 미숫가루 몇 봉지 등뿐이었다. 당시 미군과 함께 이 작전을 하기로 했으나 실패를 우려한 미군은 포기하고 결국 우리 군만 참가했다.

상륙 작전은 동해에서 미군함 미주리호로 삼척 근처에서 상륙 작전 준비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고, 서해에서는 서해 최적의 상륙 지점으로 간주된 군산시에서도 상륙 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 작전으로 시작됐다. 

9월 4일 상륙 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됐으며, 상륙 당일인 9월 15일까지 지속됐다. 9월 15일에는 영덕군에 장사 상륙 작전이 실시됐다. 

장사 상륙 작전에서 생존한 학도병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장사 상륙 작전이 9월 14일에 일어났다고 알고 있으나, 해군 기록에는 9월 15일에 장사 상륙 작전이 진행됐다고 적혀있다.

문산호는 장사리 해안 50m까지 접근했으나 태풍 '케지아' 영향으로 높은 파도와 짙은 안개로 목표 지점에 댈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날 오전 4시께 그대로 상륙 명령이 떨어졌다. 

부대장의 총성을 시작으로 학도병들은 바닷물에 뛰어들어 해안에 있던 북한군의 화력을 뚫고 상륙을 감행했다. 그러나 선두에 섰던 대원 수십 명이 적의 총에 맞아 숨지고 파도에 밀려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문산호 갑판에 있던 박격포와 영국 구축함의 함포사격 지원으로 적의 공세가 주춤한 사이 먼저 상륙한 대원들이 배와 해안가 소나무를 밧줄로 연결해 날이 밝을 무렵 다른 많은 대원이 육지를 밟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 포화를 맞은 문산호가 함미가 파괴되고 닻이 끊어지면서 좌초했다. 전투에 앞장선 지휘관들이 전사하자 학도병들은 과감한 돌격작전을 감행해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해변을 점령했다. 

그날 오후 상륙 12시간 만에 해변과 가까운 남서쪽 야산에 있던 적의 고지와 반경 10㎞ 내 북한군을 소탕했다. 포항으로 통하는 7번 국도를 장악하는 전과를 올리고 북한군 보급로를 차단했다. 

하루 뒤인 15일 오전 6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으나 대원들은 이후부터는 외로운 전투를 벌여야 했다. 17일부터 북한군이 탱크와 2개 연대를 동원해 반격을 시작했으나 식량 부족과 통신 두절로 고립된 상황에서 악전고투를 치렀다.

19일에야 아군 철수를 위해 유엔군 LST 조치원호가 장사해변에 도착했으나 상륙 당시 문산호와 마찬가지로 육지에 접근하지 못해 역시 밧줄을 연결해 철수작전에 나섰다.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조치원호 일부가 파손하고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구조작전을 포기하고 해변에 30여 명의 학도병을 남겨둔 채 철수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가려진 장사상륙작전 6일간 전투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하는 큰 희생을 치렀다.

그 뒤 잊힌 장사상륙작전은 1980년 참전 학도병들이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를 결성해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이 작전은 군사기밀이었기 때문에 6·25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장사해변 일대에는 2012년부터 영덕군이 장사상륙작전 전승을 기념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3만여㎡ 터에 위령탑, 위패봉안소, 전시교육관, 참배 광장, 문산호 침몰지점 상징 조형물 등 현충시설과 서바이벌 체험장, 전망대, 생태연못 등 편의시설이 들어선다. 공원에는 당시 침몰한 문산호도 65년 만에 복원했으며 매년 9월에는 위령제와 추모 음악제도 열고 있다.

이희진 영덕군수는 "장사상륙이 없었으면 인천상륙도 없었을 만큼 중요한 작전인데도 우리는 오랜 시간 잊었다"며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학도병을 기리고 장사상륙을 다시 조명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념사업을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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