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옥

                                                      
우리가 헤어지던 날은 
깜두라지 열매가 익어가고 있을 때 
밭둑으로 빗방울 조금 일렁였고 마른 갈대 조금 깊어졌고 
은행나무 그늘 풀 섶에 몸을 풀고 노랗게 흘러가고 있었지
아직 덜 여문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가을 속으로 떠나갔지
 
나는 간혹 너를 못 잊고 또 때때로 잊기도 하면서
오래오래 저물녘을 생각 했지 
밤이면 휘몰아치던 열망에 대해 중독된 향기에 대해
미완의 사랑에 과대포장은 금물이라고 위안을 했지

낡고 헐렁한 날이 깜두라지 빈 꼬투리로 떨어지고
액자 속 우리의 안부가 옛날을 더듬고 있는 사이  
어느 교회당 모퉁이에 한 무더기 분꽃이 피고 있었지
오후 4시에 문을 여는 꽃방, 기다림으로 흥건해진  
까만 씨방이 흰 속살을 품고 여물어가고 있었지 

생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이렇게 문득 다시 만난다는 것
분꽃처럼 또 다시 저녁을 향해 꽃잎을 열고
뜨거운 심장 세울 수 있다는 것

박경옥
계간《문파》수필부문 신인상. 한국시학 동시부문 신인상.
한국문인협회, 수원문인협회, 경기시인협회, 
한국카톨릭문인회 회원. 동남문학회장 역임.
계간 ‘문파’ 편집위원. 수필집 『발자국마다 봄』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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