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방, 전통 한지 문화의 ‘산실’

품질 좋은 ‘닥나무’ 찾아온 가평서 46년간 이어와

 ▲ ⓒ경양일보▲ ⓒ경양일보

(가평=최태홍 기자) 빠르게 새로운 시대가 밀려오지만, 옛 것의 소중함과 가치를 이어가는 장인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오히려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낸다.

‘천년을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전통 한지를 만드는 가평의 장지방 역시 마찬가지다. 이곳은 닥나무를 이용해 수작업으로 한지를 만들어 온 전통 한지 문화의 산실이다. 장지방이란 ‘장씨 집안에서 종이를 만드는 곳’을 뜻하며 4대 126년째 전통방식 그대로 닥나무를 이용해 한지를 만들고 있다. 우리 전통 종이를 생산하는 곳으로 한지의 우수성을 보존하고 있는 공방이다.

정성으로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뜬 ‘한지’

경기도 중요무형문화재 지장 장용훈 옹은 전쟁 이후 부친과 함께 17살 무렵부터 한지를 시작했다. 그러다 1970년대 양지가 보급돼 그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한지 생산 분야의 큰 침체기를 맞게 됐다. 많은 이들이 한지 만드는 일을 그만뒀지만, 그는 오히려 얼마 남지 않은 돈을 털어 닥나무 품질이 좋은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해 정착하게 됐다.

물론 가평으로 이사를 온 이후에도 여러 차례 힘든 일을 겪었다. 그러나 아들들이 합세해 종이를 만드는 일에 정성을 쏟았고 시간이 지나 그 노력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그의 첫째 아들 장성우 씨가 그 방식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한지(韓紙)는 백지라고 불린다. 그 빛깔이 희고 고와 백지(白紙)라고도 하지만, 한 장의 종이를 만들려면 만드는 사람의 손이 아흔 아홉 번 가고 사용하는 사람의 손이 백 번째로 간다고 하여 일백 백(百)자를 써 백지(百紙)라고도 한다. 그만큼 정성과 인내가 필요한 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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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키운 닥나무와 천연재료만을 이용한 ‘친환경 소재’

한지의 재료는 닥나무 껍질이다. 닥나무는 추수가 끝나고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1년생을 거둬 쓴다. 고목으로는 좋은 종이 제작이 어렵기 때문에 매년 나무를 잘라 관리를 해줘야 한다. 지금 장지방에는 닥나무 1000주 정도를 관리하고 있다.

닥나무는 구덩이를 파고 돌을 달궈 수증기를 발생시켜 찌게 된다. 이렇게 6~7시간 푹 쪄내면 닥나무 껍질을 벗길 수 있다. 이렇게 껍질을 벗긴 후 다시 겉껍질을 칼로 일일이 벗겨낸다. 이렇게 제거하면 ‘백피’가 나오게 되는데, 이 백피로 종이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백피는 콩대·메밀대·목화대·고추대 등의 천연재료를 태운 재에 맑은 물을 부어 만들어 낸 잿물에 삼는다. 섬유질인 닥나무 껍질을 종이로 이용할 수 있도록 연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이렇게 삶아지면 또 다시 본격적인 작업이 진행된다. 잿물에 삼아 약알카리성을 띠게 된 재료를 중화하기 위해 여러 번 반복해 지하수로 우려낸다.

그리고 종이 제작에 방해되는 이물질을 고르는 과정을 거친다. 깨알보다 작은 이물질까지도 하나씩 찾아내는 걸러내는 과정이다. 그렇게 걸러진 재료는 곱게 갈기 위해 두들겨서 풀어준다. 섬유질을 솜처럼 풀어지게 만든 다음 발틀을 이용해 엉킨 섬유질을 얇고 고르게 펴 만드는 것이 바로 한지다.

곱게 빻아진 백피 즉 닥 섬유는 물과 황촉규를 함께 섞어 발을 이용해 뜨게 된다. 발틀 위에 대나무체를 얹어놓고 지통에서 앞물질과 옆물질을 해 얇은 한지를 떠 올린다.

‘출렁~’하고 앞 물질 한번, 또 ‘출렁~’ 옆물질 두세 번. 발틀 위에 대나무체를 얹어놓고, 물질을 통해 자연의 재료들이 종이로 그 모양새를 갖춘다.

앞물질은 종이의 뼈대가 되고 옆물질은 종이에 살을 올려준다. 이렇듯 두 손으로 한지의 인물과 살을 붙인다. 만들어진 한지는 가는 실을 두고 한 장 올려 적당히 물을 뺀 후 한 장씩 열판에 올려 건조시킨다. 건조 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침’ 이라는 방망이질을 통해 내구성이 강하고 질감이 부드러운 한지로 만들어 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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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방식의 한지, 유물보존처리의 큰 조력자

한지는 보존처리용으로 이용돼 옛 유물을 효과적으로 보관, 보존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있다. 세계 최초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아직까지 보존돼 있은 것은 한지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한지는 앞물을 떠서 뒤로 버리면서 섬유를 세로로 누인 다음 좌우로 물을 떠서 버려 섬유가 좌우로 교차해 있다. 찢거나 잡아당기는데 견디는 힘이 강한 이유다. 또한 미생물이 잘 번식하지 않고 단열효과와 통풍성이 좋으며 습도 조절에도 도움을 줘 부패를 막아준다. 때문에 유물을 보존·보관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파손, 훼손된 유물의 수리·보강 처리하는데 중요한 재료가 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열린 ‘한지와 문화재 복원에 관한 한-이탈리아 심포지엄’에서는 한지가 양피지로 된 서양 고문서의 복원ㆍ보존하는데도 적합한 소재라고 인정받기도 했다. 얇은 한지 보강재 한 장으로도 그 수명이 크게 개선됐다고 전문가들이 입을 모았던 것이다.

이밖에도 화합첨가제와 인위적으로 탈색하는 인스턴트 과정 없이 자연재료 그대로 만들었다는 장점 때문에 공예, 서예나 그림, 벽지, 보전처리 등의 용도 외에도 아토피 아이를 위한 벽지와 벽장식, 한지 내의, 니트 등 옷까지 시도되고 있다. 친환경적인 재료로 만든 한지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장지방에서는 옻과 같은 천연 염색제를 이용해 색을 내거나 대나무 발에 무늬를 만들어 문양을 넣기도 한다. 특히 옻지는 한지에 옻에서 나온 액을 칠한 종이로, 수명이 길고 옻 특유의 성질 덕분에 각종 잡냄새를 제거하고 해충을 막아 새집 도배 등에 다수 활용되고 있다.

닥나무는 중국, 베트남, 태국, 일본 등 많은 곳에서 생산된다. 하지만 한국 닥나무는 광택도 좋고 섬유장의 길이도 길다는 점이 장점이다. 섬유장이 짧으면 산화되는 시간이 짧다. 산화는 곧 노화와도 연결된다. 즉 섬유장이 길수록 강도가 높고 노화되는 시간이 늦어져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만드는 방식도 다른데, 현재 한국의 전통 한지는 세계적으로도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한지는 사람 손에서 만들어지는 종이인 만큼 마음의 안정도 중요하다”는 4대 장시방의 장성우 대표는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오히려 심적으로 동요되어 깔끔하게 떠지지 않으면 아예 뜨고 않고 쉴 때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지금은 닥나무 생산량이 적어 수입 닥나무를 이용하는 곳도 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도 직접 닥나무를 키워 정직하게 고품질의 한지를 만드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며 오래도록 지켜온 전통방식의 ‘한지’의 가치에 대한 철학을 드러냈다.

우리 문화 발달의 바탕이 된 ‘한지’의 그 우수성이 아직까지도 조명 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장인들의 변함없는 노력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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