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美)제213야전포병부대 한국전 참전용사를 만나 뵙고

가평군청 자치행정과장 윤세열

지난 10월 20일부터 24일까지 자매도시 미국 유타주 시더시(市)의 초청을 받아 미국 서부개척시대 카우보이 문화를 재현한 라이브스톡헤리티지 축제에 참여하였다.
행사 마지막 날에는 가평전투에 참여한 미(美) 제213야전포병부대원들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그날 참전용사 한분이 들려준 이야기가 여전히 나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미 제213포병부대원들은 남 유타주의 조그만 타운들인 시더, 비버, 필모아, 세인트 조오지, 리치필드시의 젊은이들로 그들은 정규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아니었어요. 대부분 학생들이거나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던 젊은이, 대부분 평소 알고 지내던 동네의 형, 동생들이었어요. 
아마추어 군인들인 우리들은 드디어 1951년 5월 26일 밤 중공군의 춘계공세 때 가평의 홍적리 계곡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치르게 되었어요. 지형은 낯설고 날씨는 춥고 통신선은 끊기고 총성이 콩 볶는 듯하고 포성이 지축을 흔들었지요.
꽹 가리와 북을 치며 어둠속에서 수천 명의 중공군이 함성을 지르며 밀고 왔어요. 19~20세의 어린 우리들은 공포에 휩싸였지요.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기고 포를 쏘고 또 쏘고 드디어 새벽이 되자 가평군 북면 홍적리 계곡에 총성이 멈췄어요
그날 하루 밤 사이에 적 사살 350명, 생포 800명 그러나 600명의 우리 제213야전포병부대원들은 한명의 희생자도 없었지요. 그리하여 “가평의 기적”이라 불리지요. 남북한 휴전이 이루어진 후 1953년 10월 어느 날 오후 나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 마을로 민정시찰을 갔어요.
지암리라는 마을이었는데 총성이 멎은 마을 앞 논에서는 누렇게 벼가 익어가고 마을로 들어가는 길 양편에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고추잠자리가 들녘을 날고  바람도 서늘했지요. 모처럼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았어요.
그런대 어느 초가집에서 60세 정도 되 보이는 한 촌로가 대문 밖으로 나오더니 미 군복을 입은 나를 집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어요.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 노인의 공손한 태도에서 친절함을 엿볼 수 있었지요.
그 촌로는 부인에게 밥을 지으라고 하고 나를 방안으로 안내했어요. 방안에는 제대로 된 가구하나 없었지만 선반위에는 자그마한 이불 한 채가 있었어요. 드디어 밥상이 들어왔어요. 밥상에는 누런 놋 식기에 고봉으로 담은 쌀밥 한 그릇, 간장 한 종지와 김치가 전부였어요.
그 노부부의 정성을 감안하여 나는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어요. 그리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대문을 나서는 순간 그 노인은 방금 전에 내가 사용했던 놋숟가락과 젓가락을 선물로 주었어요.
피난에서 돌아와 살림살이라고는 거의 없는데 그 집의 가보와 같은 놋숟가락과 놋젓가락을 흔쾌히 나에게 주셨어요. 나는 차마 그것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 노인은 계속해서 나에게 그 놋숟가락과 놋젓가락을 손에 쥐어주었는데 나는 그 노인의 성의를 거절할 수 없어 놋숟가락 하나만 받아왔어요.」
그러면서 그 참전용사는 65년 전 받아온 그 놋숟가락 하나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누렇게 빛바랜 65년 전 지암리 어느 농부가 주었다는 놋숟가락 하나. 나는 그 놋숟가락을 보는 순간 호젓한 시골마을을 총성과 포성을 울리는 공포의 전쟁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북한공산주자들로부터 평화를 되찾아준 미군에 대해 한 농부가 감사의 마음을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숙연함이 밀려오며 나의 가슴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어렵지만 한번 입은 은혜에 대해 보답할 줄 아는 우리 부모(민족)들의 넉넉한 마음을 그리워하는 것은 나만의 사치인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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