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연 영남취재본부 부장

신사임당은 조선시대 유명한 여류문인이고 서화가다, 이보다 더 알려진 것은 대학자이며 역사적 인물인 율곡을 길러낸 한국인의 어머니상으로 칭송받는 점이다.

신사임당은 어릴 때 부터 경전을 읽어 문장에 능통했고 바느질 자수까지 정묘했으며 당대의 대가인 안견으로부터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워 신사임당이 그린 병풍이나 족자가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액 화폐인 5만원권 초상 인물로 선정돼 율곡과 함께 모자가 화폐초상에 들어가 한국인의 친숙한 인물이 되었다. 

율곡이 대학자로 이조판서, 대재학을 했지만 신사임당이 율곡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율곡이 16세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율곡이 성장할 때 역경을 이겨가며 키운게 아니라 유복한 가정에서 어머니 역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사임당이 경전을 배웠으니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지만 믿을만한 기록에 구체적 사례가 없다. 

반면 율곡에 앞서 조선의 대표적 학자로 칭송받고 있는 퇴계 어머니 박씨 부인은 신사임당과 달리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퇴계를 길러냈다는 기록이 남겨있다. 

7남1녀의 막내로 태어난 퇴계가 생후7개월만에 박씨 부인이 32세때 남편을 사별하고 그 많은 자녀들을 키워냈기 때문이다. 박씨 부인은 자녀들에게 “과부아들은 배운게 없다고 비난하니 너희들은 정신차려 남보다 백배 더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라고 독려했다. 많은 자녀 생활을 위해 농사를 돌보고 길쌈과 양잠에 힘을 쏟았다. 

퇴계가 성장해가자 벼슬에 관심이 없는 것을 알고 학문에 정진하도록 이르기를 “글공부나 한다고 글이나 달달 외우고 글짓는 것만 일삼치 말라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행실을 삼가는 것이 더 소중하니라 했다”. 

퇴계가 문과에 급제하고도 벼슬을 몇번이나 사양했고 관직을 맡아 뜻을 펼수 없으면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님 가르침데로 학문연구에 정진, 대학자로 참선비로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만약 퇴계 어머니가 벼슬로 출세를 원했다면 퇴계가 이를 거역하지 않아 학문적 위업을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자식의 자질을 먼저 알아본 어머니의 선견지명이 퇴계란 인물을 만들었으니 장한 어머니 상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오늘날 한국의 어머니들 가운데도 신사임당이나 박씨 부인같은 이들도 있겠지만 거의가 무조건적인 교육에만 올인 오늘의 한국을 만들어 냈지만 지금은 그 역기능이 한국사회를 어렵게 하고 있다. 

자녀들 과외 학습비 충당을 위해 잡일이나 대리운전까지 마다않는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자질이나 능력을 덮어둔채 좋은 대학가고 출세만 해주기 바란다.

유태인 격언에 ‘신은 도처에 가 있을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는게 있다, 자녀는 어머니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다, 적어도 철이 나기 전까지는 자녀에 있어 어머니는 신이다.

퇴계나 율곡이 학자로서 존경받는 것도 있지만 참스승이고 군자다운 참선비 였기 때문인데 이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결손가정 어린이가 188만명이란 통계가 최근 나왔다. 요즈음은 자식이란 키우는 재미외에는 소비만하는 존재로 생각 결혼을 겁내고 출산을 기피하는 신세대들을 본다. 

결손가정에서 역경을 이겨내며 7남매를 양육하고 퇴계라는 대학자를 키워낸 그의 어머니 박씨부인의 어머니상이 떠오른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전국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