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숙

잘 자란 깻모 새벽 밭으로 간다
주인의 쟁기 소리를 기억하는 밭은 
기꺼이 제 품을 연다

안식년 한번 없이
열아홉에 시집와 날 낳으시던 이튿날도
밭을 매던 고된 시집살이를 다 받아낸 땅이었다

수십 년 계절을 넘나들며 학자금이 되어준
눈치 빠른 깨밭이 서툰 쟁기질을 얕보고 있다

불끈, 손끝에 힘을 다져보지만
옆집 송아지만한 개마저 컹컹 짖어대고
밭 주변 밤나무는 가지를 흔들며 구경하고 섰다

한낮의 땡볕에도 땅을 파고 물을 채운다
한 모 한 모 다져 심고 또 심었다
삼대의 발소리가 뒤섞여 오후를 달구고
열을 갖춘 깻모들 슬쩍 고개를 든다

어머니의 일생이 고스란히 기록된 
깨밭, 옥수수밭, 고추밭 여름이 무르익으면 
땀방울에 젖은 초록 옥수숫대는 바람에 너울거리고 
깻모는 훌쩍 자라 잔망스런 깨꽃을 틔우며
고추밭은 또 얼마나 붉은 꽃을 피울까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늘 그랬던 것처럼 버석버석 타드는 대지에 
흡족한 단비를 내려주실 것이다

황병숙 

1972년 철원 출생. 2017년《열린시학》 한국동시조 등단
한국문인협회, 열린시학, 두레문학, 작가들의 숨, 시산맥 회원 
대외협력 청년분과장역임, 수원문인협회 회원
제9회 국민일보 신춘문예 장려상, 자랑스러운 수원문학인상 수상 
제11회, 12회 전국 해남 시조백일장 최우수상 
수원문학 창작지원금 시집: 『숨길 수 없는 사랑』 
              
                                      <수원시인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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