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영 大記者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했다고 할지라도 흙의 소산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나 생물이 있을 것인가? 흙을 등진 민족은 반드시 병들고 시들어 망했던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오래 전에 동아일보에 연재 되었던 “속솔이뜸의 댕이” 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작가는 충청도 산골처녀로서 거액의 현상 작품 당선자가 되었는데 그 내용을 나는 잊을 길이 없다. 춘의 “흙” 심훈의 “상록수” 등과 더불어 “속솔이뜸의 댕이”는 우리의 가슴을 지금도 뜨겁게 하고 있다. 

1940년대 우리 한국은 무척 가난했고 굶어 죽는 일도 있었던 시대에 고달프게 살아가는 한 가정이 있었다. 먹지 못해 깡마르게 늙어가는 아버지와 굼주려서 야위어 빠진 어머니와 사춘기의 처녀가 산골 밭두렁에 함께 나와 일하면서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굶어서 죽더라도 종자 씨앗은 먹을 수 없다는 거였다. 또 아버지는 “내가 죽거들랑 저 밭머리에 묻어다우 썩어서라도 우리 밭에 밑거름이 되리라”고 했다. 산골 농사꾼 일가족의 짧은 대화 속에는 흙에 대한 깊은 사랑의 강물이 흐르는 듯하다. 싱그러운 반나체의 청춘 남녀 한 쌍이 모래사장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키스의 소나기를 퍼 부으면서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이렇게 사랑타령을 되뇌며 엎치락뒤치락  떨어질 줄을 모르는 장면보다 참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소박하고 깊고 은근한 사랑을 느끼게 하는가? 내가 죽거들랑 저 밭머리에 묻어다고 죽어도 내 땅 흙속에 묻혀서 비옥하게 만들고 싶다는 산골 농부의 심장에서 뜨겁게 우러 나오는 인간 본성의 감동이 있었다.

가족과 동포를 먹여 살릴 흙을 제 몸을 썩혀서까지 라도 비옥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농부의 마음씨가 도시의 정치가들과 상인들, 스포츠인들과 연예인들 교육자들과 군인 모든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억조창생을 먹여 살려왔고 앞으로도 자상의 만인을 먹여 살려 갈 것이다.

흙은 영원한 어머니의 젖가슴이다. 온갖 풍성한 축복이 흙에 있다. 인간에게 흙보다 더 소중하고 필수적이고 고마운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흙은 단한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을 모두 수용하고도 한마디 자랑도 불평도 없이 묵묵히 모든 생물들의 어머니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짓밟고 춤을 뱉아 버려도 한마디 대꾸가 없는 참으로 너그럽고도 끝같데를 알 수 없는 하늘같은 마음이다. 이런 흙을 가까이 하는 이들은 흙처럼 소박하고 꾸밈이 없으며 진실하며 위선이 있을 수 없다. 흙처럼 너그럽고 인정이 많은 사람으로 다듬어 진다. 아귀다툼이나 불면증이나 히스테리가 있을 수 없다. 꿀맛 같은 단잠과 식사는 그대로 넘치는 건강과 만족을 제공한다.

흙과 더불어 사는 삶은 불멸의 명작인 밀레의 “만종"처럼 한 폭의 그림자 같은 삶인 것이다. 거기엔 시기도 질투도 허영도불신도 있을 수 없다. 온갖 축복에 대한 감사와 넘치는 건강과 삶의 보람이 있을 뿐이다. 흙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흙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현재와 미래에 이르기까지 시들지 않는 축복과 변질되지 않는 행복을 안겨 주리라. 이런 고마운 흙이 인간의 조잡스런 잔꾀로 말미아마 화학비료와 각종 농약 사용으로 지력은 상실되고 생산되는 농작물 역시 인간에게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무서운 비극이다.

작은 면적의 토지라도 알뜰히 걸구어서 참으로 사람에게 피와 살이 될 식물을 생산하여 먹어야 될 것이다. 고마운 흙을 생각하면 어쩐지 어머니 같은 생각이 든다.  모든 생명이 흙으로 빗어지고 흙으로 존속되다가 다시 흙으로 모두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흙에서 태어난다. 흙은 모든 생명을 포용하는 어머니의 품이며 끝없이 키워 주는 풍성한 어머니의 젖가슴이다. 인간이 흙과 멀어지면 몸과 마음이 병들어 망가지고 만다. 기름진 농토는 점점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포장되므로 사람들의 마음도 아스팔트에 포장되어 말할 수 없이 살벌하고 무섭고 인간미가 메말라가고 있다.

이 세상에 단 한번밖에 초대되지 않는 한 목숨인데 핏발 선 눈으로 흙이 아닌 아스팔트 위를 정신없이 달리다가 쓰러지고 마는 현대 도시의 방황하는 삶에서 우리는 무슨 보람과 매력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한 푼의 가치도 없는 허영심, 자만심, 자랑, 체면 눈치 보느라고 흙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돈은 왜 버는가? 그토록 죽으라고 지독하게 애써서 번 돈을 어디에 다 쓰겠는가? 미친 듯이 돈을 따르다가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상실하고 있지 않는가? 또한 죽은 자의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엄숙한 한 번의 삶을 허영의 재물로 체면의 재물로 희생시킬 수는 없지 않을까? 

의미 없이 안개처럼 물거품처럼 무의미하게 없어질 수는 없지 않는가? 영원한 시간에 비할 때 인생일생은 한순간이요 찰나이다. 마치 한 점과도 같아서 없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조물주의 계획에 따라 흙과 가까이 할 때 삶은 건강해지고 새롭게 각성되며 방황이 끝나고 건강과 만족 우주가 보이고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 서게 된다.

요즈음 일부 정치인들과 정부 고위직을 지냈다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전부 남의 탓이 아니면 윗선에서 지시에 의해서 했다는 등 부끄러움도 없이 얼굴까지 처들고 얘기하는 모습들을 보면 믿을사람없는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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