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영 大記者

우리 상주(尙州)가 지명(地名)으로 쓰여진 최초의 기록은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16년)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통치수단으로 전국을 9개주로 나누어 사벌주(沙伐州)를 상주로 고치고 주도(州都)로 삼았을때이다, 신라땅과 백제땅에서 그때의 지은 이름을 부르는 곳이 상주, 전주(全州)두 곳뿐으로 자그마치 1250년동안 같은 이름으로 불리워졌고 그 후 정국을 8개 도로 나눌 때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와 경상도(慶尙道)라 하였으니 ‘상서로운 고을이란 글자 풀이 되로 상주는 유서 깊은 전통을 갖고 있다.

지금은 비록 시세(市勢)가 옛날보다 크게 줄었지만 아직도 전국 자치구중 가장 넓은 땅을 가지고 있어 지난날의 웅주(雄州)다운 면모를 잃지않고 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 전통을 간직한 상주에는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 남아있고 이 땅에서 배출한 인물들이 걸출하여 선대(先代)들이 남긴 정신적 유산이 곳곳에 베어있다, 삼백(三白)의 고장이란 상주의 별명은 쌀을 넉넉히 생산할수 있는 넓은 들 풍광의 아름다움과 순박하고 질박한 우리민족의 상징인 흰색으로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담고 있으며 충절과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워 졌으며 우리의 선대들이 빛내온 상주정신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지난날의 우리고장 명성인 외형적인 삼백의 고을이나 내면세계의 선비정신을 그대로 지켜가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자괴지심(自愧之心)이 들지않을수 없다.

필자가 과분한 탓이기를 바라지만 오늘의 상주가 그 옛날의 상주땅을 지키고 있으돼 선대들이 이룩해 놓은 밝고 순수한 삼백의 상주정신이 과연 살아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일부 출향인사들의 말을 빌리면 상주라고 말하면 남해안에 있는 조그만한 해수욕장 쯤으로 일컷는 타지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 옛날의 웅도(雄都)였던 상주가 국토변방의 마을쯤으로 알려질 수밖에 없다면 삼백의 특산품을 그들이 알리 없고 겨우 지역내 사람들끼리 실속없는 명성을 붙들고 있는 셈이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상주인의 긍지가 사라지고 있다는데 있다 

이 고장에서 배출한 명현대유(名峴大儒)한 학자들을 비롯한 우국충정의 충신지사가 상주의 정신으로 삼았던 예절의 고장, 선비의 고장이란 그 명성은 한갓 구호처럼 들릴뿐이다.

예절은 인본주의(人本主義))에 바탕을 둔 타인(他人)도 나와 다름없는 사람이라는데 있다, 내가 예절로 타인을 대하면 나또한 그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는다는 호혜(互惠)정신에서 출발한다. 나이든 사람 (선배)을 공경함으로써 밝은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동문수확한 선.후배간에도 위계를 지키면서 남을 높혀주고 자기를 낮추는 것이 예절의 기본이요 겸양의 선비정신 또한 여기서 출발한다.

필자는 언제부터인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한다거나 여론주도층간에 보이지않는 반목이 있다는 상주사랑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이라고 보지만 유사한 말들이 병행하는 것 자체가 상주발전과 지역통합의 저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지않나한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 “저사람이 하는 것은 틀렸다”고 하는 것은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아집에 불과하다, 돌아앉아 남은 비평하기는 쉬워도 자신 또한 그런 대상에 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바로 이런것들이 상승작용을 일어키고 지역화합을 깨뜨린다, 예부터 내려온 삼백의 정신, 예향(隸鄕)의 정신이 다시 살아숨쉬는 우리 상주정신을 일으켜 세울수 있는 방법을 한번쯤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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