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태 시인/작가
허경태 시인/작가

늦은 밤에 책상에 앉아 하루를 되돌아본다. 일요일 아침, 부학산을 오르내리며 두어 시간을 보냈다. 산에 설치된 운동기구로 운동을 하고 땀도 흘렸다. 산에서 내려와서는 샤워를 하고 잠시 독서를 했다. 오전 11시쯤 아점으로 김치볶음밥을 먹고 도서관에 가다가 휴대폰을 깜박해서 다시 집에 왔다가 도서관 가는 것을 포기하고, 시내 중심지인 중앙상가를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봄이지만 30도가 넘는 여름 날씨다. 운동 삼아 천천히 걸어서 먼저 죽도천주교회 앞 ‘갤러리 포항’에 갔다. 마침 단체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상호작용(相互作用)’이라는 테마로 전시된 5명의 작가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중앙동 꿈틀로 거리와 대흥동 상가 1번지를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도심공동화로 꿈틀로에는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고, 그나마 중앙상가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틀로에서 작업을 하는 화가 박경숙 미술관과 박수철 아뜨리에를 방문했으나 문이 닫혀 있었다. 발길을 돌려 젊은 날, 시내 최고의 중심지이자 이십 대 후반 고모님의 주선으로 첫선을 보았던 우체국 근처 귀족다방도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곳에서 첫선을 봤던 처녀는 지금쯤 어디에서 누구와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 시절, 수시로 친구들과 만나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던 대일다방도 문을 닫았고, 시민극장과 극장 맞은편 매주 시낭송을 열었던 두꺼비다방, 학창시절 친구들과 자주 찾았던 대일분식, 명승원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포항을 대표하는 시민제과는 사라졌다가 몇 년 전부터 다시 문을 열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과거 추억을 떠올리며 상가 실개천을 따라 걷다가 학원사에 들러 책 구경을 하고 구본형과 홍승완 작가가 쓴 ‘마음편지’를 구매했다.

서점을 나와 상가 뒷골목으로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구 포항역 철길 숲을 따라 귀가하다 나무 그늘아래 설치된 벤치에 앉아 흐르는 땀을 식혔다. 포항의료원 입구 건널목에 와서는 평소 단골 분식집인 공원쉼터에 들러 잔치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랬다.

분식집을 나와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산책을 하시던 친목회 회장님을 만났다. 회장님은 지난달 모임에 불참해 그동안 소식이 궁금했다면서 다음 달 모임에는 꼭 나오라고 하셨다.

회장님과 헤어지고 나서 방장산 터널 아래까지 걸어와서 휴대폰을 보니 2만 8천보를 걸었다. 아침 산행에다 집에서부터 시내를 계속 걸어 다녔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열고 서점에서 구매한 ‘마음편지’를 꺼냈다. 먼저 여는 글이 나오고 차례가 소개되었다.

책의 내용은 2013년 4월에 작별한 구본형 변화경영사상가의 질문에 대한 홍승완 작가의 답글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홍 작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으로 서리라』은 책의 원문을 각색해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나 어두운 무덤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삶이란 그 두 어둠 사이의 짧고 빛나는 순간이다.” 라며 독자에게 묻는다.

“어둠과 어둠 사이, 이 짧고 빛나는 순간에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을 얼른 하나 들어본다면 그게 뭘까요?”라고.

홍 작가는 질문이 답만큼, 아니 답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답이 아닌 질문이 나란 세계를 열어 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다수의 사람은 대답형 인간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질문형 인간으로 살면 똑똑한 사람이기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평생을 살면서 나는 몇 번의 질문을 했는지. 되돌아보니 평생 대답형 인간으로 살아온 것 같다.

공평하게 한번 주어진 인생, 누구는 위대하게 살다 가고, 누구는 어림도 없는 삶을 남기고 떠난다. 그러나 각자의 존재만큼은 중요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살아있는 동안 각자 나름의 꾸준한 성찰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질문하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한다.

일요일 하루를 걷다 보니 그동안 나를 살게 했던 지난 시간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시내 중심지인 중앙상가 거리를 수없이 걸었으면서도 젊을 때 보지 못했던 고향의 향기를 세월이 지난 이순의 나이에야 깨닫는다. 세월은 무심하게 그냥 흘러가는 게 아니라 내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때가 되면 꽃이 피듯이 세월은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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